[Review] 살인자의 기억법 — 무너져 내리는 기억의 성벽 위에 세운 지독한 반전
기억이 사라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당신의 심장을 조여오는 지독한 추리극

안녕하세요! 오늘의 책은 바로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입니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상병 시절의 그 귀한 하루를 이 책 한 권에 다 쏟아붓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다 읽었다고 생각한 순간, 저는 저절로 책의 첫 페이지를 다시 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소설은 최소한 두 번은 읽어야만 비로소 ‘진짜’ 완독이 가능한 기묘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는 화자가 던지는 거대한 균열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사건을 서술하는 ‘나’라는 인물에게 있습니다. 그는 과거 연쇄살인범이었으나 지금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노인입니다.
상상체계로 지어 올린 위태로운 진술 화자인 늙은 살인범은 자신의 죄에 대해 어떠한 죄책감이나 가책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무너져가는 자신의 기억력을 붙잡으며 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하지만 그의 진술은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 그가 견고하게 쌓아 올린 상상체계에 가깝습니다.
소설이 끝나는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의 기억이 사실은 거대한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요. 이 ‘믿을 수 없는 화자’의 정체가 드러나는 반전은 마치 전기 충격을 가하는 것처럼 강렬합니다.
첫 장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독자는 자연스럽게 소설의 앞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어디까지가 그의 상상이고 무엇이 실제 벌어진 일인가? 내가 연민을 느꼈던 그의 고통은 실재하는 것인가?
이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 우리는 처음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에 몰입하게 됩니다. 두 번째 읽기를 마쳐야 비로소 작가가 숨겨놓은 정교한 설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죠.
수치와 죄책감 사이에서 묻는 윤리
소설은 상상 속의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괴리를 통해 우리 시대의 윤리를 날카롭게 묻습니다.
나를 잃지 않는 것과 상상에 갇히는 것의 경계 타자의 시선에 얽매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나를 지키기 위해 혼자만의 상상 속에 갇히는 것 또한 위험한 일임을 시사합니다. 어느 누구도 죄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면, 자신이 저지른 과오만큼의 죄책감을 짊어지고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Rating: ★★★★★
군대에서의 하루를 순식간에 삭제해버릴 만큼 압도적인 흡입력을 가진 작품입니다. 김영하 작가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우아한 문장이 기억이라는 위태로운 소재를 만나 폭발적인 시너지를 냅니다.
지루한 일상에 강력한 정신적 자극이 필요하신 분이나 정교하게 짜인 반전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강력히 추천합니다. 한 번 펼치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멈추기 힘들 것이라 확신합니다.
기억이 사라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당신의 심장을 조여오는 지독한 추리극입니다.
